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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청산면의 유래

청산면(靑山面)은 한때 仙山(선산), 仙源(선원)이라 불렸으며 신라시대 (新羅時代)부터 많은 주민이 살았다는 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되나 구전(口傳)에 의한 것이며 기록은 찾아볼수 없고, 고려(高麗)때는 탐진현 (현 강진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임진왜란으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정부에서 도서금주령을 내려 한때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선조 41년(1608년)에 처음 入島 거주하였으며, 숙종 7년(1681년) .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이후부터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서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고종 3년(1866년)에는 당리에 독진을 설치하여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그후 고종 33년(1896년) 완도군(莞島郡) 창설 (創設)에 따라 완도군(莞島郡) 산하 청산면(靑山面)이 되었다.

1964년 10월 1일 대모도 동리에 모도출장소를 설치 하였고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1981년 12월 23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청산도는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청(靑 푸를청) 산(山 뫼산)자를 따서 청산이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산면의 연혁

  • 1608년 (선조 41년) - 입도 거주
  • 1681년 (숙종 7년) - 수군만호진 설치
  • 1866년 (고종 3년) - 당리에 진 설치
  • 1896년 (고종 33년) - 완도군 설군으로 청산면 설치
  • 1964년 10월 1일 - 모도출장소 설치
  • 1981년 12월 23일 -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 2007년 12월 1일 -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승인
  • 2011년 국제슬로시티연맹 세계슬로길 1호 등록
  • 2013년 구들장 논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 선정
  • 2013년 6월 - 국제슬로시티 연맹 슬로시티 재인증
  • 2014년 4월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마을유래

도청마을(청산면 도청리)1구

마을형성

도청리는 조선 인조 18년 경에 장수황씨(張水黃氏), 충립(忠立)씨가 고금 농상리에서 청산도의 돌불산 또랑산에 입도하여 살게 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나주정씨인 정시석(丁時錫)씨가 장흥국 대덕면 옹암 신리에서 경치(鯨峙) 고래지미에 입도하여 움막을 짓고 살다가 현 도청리 1구 351번지 청산 입대조로부터 13대인 정혜선씨가 거주하고 있는 종가집터 자리로 옮겨 돌담을 쌓고 움막을 지어 땅을 개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맨 처음 마을 이름을 경치(鯨峙)라 하였으나 강진군 탐진현(探津懸)에 소속되면서 불목리(佛目里)라 하였고 조선시대 조세(祖稅)을 받던 기관으로 국세미도봉청(國稅米都奉廳)이 설치되면서 里名을 도청리(都廳里)로 불려오다가 고종 32년 1895년 靑山島 22대 金在興 첨사를 마지막으로 진(鎭)이 폐진 됨에 따라 도봉청(都奉廳)이 폐지되고 錢納制가 되면서 도청리(道淸里)로 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후기 道淸里의 里名

  • 1759년 ~ 1789년까지 佛目里 都廳里2개마을
  • 1876년 ~ 道廳里12통 61호 佛目里3통 13호 2개마을
  • 靑山錢지 ~ 1895년 道淸里로 改稱 2000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마꼴 : 고구마가 맨처음 들어와서 재배되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다른 곳에선 결실이 잘되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고구마(감자)가 잘되었다고 하여 지금도 지명 이름을 풍마꼴이라 전해 오고있다 오고 있다.

당산목 : 청산 중학교 밑 도청리 1구 마을 위편 사장에 있는 당산나무 약 200년의 수령을 가진 나무로 추정된다.

도청마을(청산면 도청리)2구

마을형성

마을 形成은 도청리 1구와 同一하다. 里名을 예부터 佛目里라 하였는데 사절(寺切)이나 불교(佛敎)에 대한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이 추측되나 기록상으로 고증(考證)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어떻게 붙여진 里名인지는 미상(米詳)이다.

지명유래

조선조때 佛目里에 도봉청(都奉廳) 국세미를 수납관리하는 관청이 설치 되면서 里名을 都廳里로 불려오다가 고종32년 1895년 靑山鎭22대 김재흥 첨사를 마지막으로 진이 폐진 됨에 따라 都奉廳이 폐지되고 고종32년에 錢納制로 개혁(改革) 되면서 現 道淸里가 되었다. 이곳은 청산면의 관문으로 면내 각 기관이 집중된 곳으로 호수가 증가 함에 따라 1968년 一, 二구로 분구하여 마을 里名을 道淸里二區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후기의 청산도 里名

  • 1759년 ~ 1789년까지 : 불목리, 都廳里 2개마을
  • 1876년 ~ 道廳里12통 61호, 불목리 3통 13호 2개마을
  • 靑山鎭誌 : ~ 1895년 도청리로 개書 2001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락리

마을형성

도락리는 조선조 숙종대(1674-1720년)에 강릉 유씨인 유이성씨가 강진에서, 성산 배씨인 배홍수씨가 古潮로부터 처음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마을리 형성 되었다.

지명유래

선조들이 이마을에 이주 정착하면서 조선정조 13년 1789년에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당시 도의(道義),유도(儒道)를 崇尙하는 뜻에서 도장리(道長里)라 부르다가, 1876년 道樂里(청산진지), 1895년 도락리(道洛里)로 개서하여 불러오다가 1914년 조선시대 劉同萬 里長당시 행정법정 호적대장 기록때 지금 당리(堂里)와 道洛里를 합구시켜 법정 행정구역상 堂洛里라 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道洛里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리마을

마을형성

당리에 처음 입도한 성씨로는 淸州 韓氏가 모래 넘어 當里 屯幕洞에 와서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竹坡 金達洪 **古老 相傳之言)

김달홍씨의 고노상전지언에 의하면 청주한씨가 처음 살고 있었다고 하고, 조선 효종 원년인 1650년에 초계 최씨(草溪 崔氏)인 최우송씨가 해남에서 제주로 건너가던 중 심한 풍항으로 서남포(모래남)에 표류되어 둔막골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후 경주 정씨(慶州 鄭氏)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명유래

최초의 지명은 알 수 없으나 1759년의 여지도서 및 강진현에 청산도가 속할 당시의 호구총수(1789년)에 의하면 당리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종3년(1866년) 당리진을 설치하여 당리에 관망대와 봉화대를 설치하고 외곽에 성을 쌓고 각각 동문, 서문, 남문을 두어 고종 32년 1895년 파진될 때까지 인근 신지면, 소안면, 고금면 약산을 관할하였다하여 일면 진말이라 하였고, 덩라잔우나 1895년 22僉使 김재흥재직 당시 里名이 "鎭里"라 나오며 당시 이장은 김권숙(22대)이였다.

  • 1914년 행정구역
    里名 일람표를 보면 당리와 도락리를 합구시켜 당합리라 하였고,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당리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명)화랑포(化郞浦)
    진의 설치와 동시에 역대 진수(鎭守, 僉使)와 무사, 선비들은 따뜻한 봄이나 가을이면 기생들을 데리고 산과 바닷가를 찾아 풍월을 즐기게 되었는데 서남쪽 1.5㎞지점 산등성이에서 화창한 봄날 오후쯤에 바다물결이 꽃과 같이 아리따운 낭자와 같아 취홍에 못 이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 지명을 화랑포(化郞浦)라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아름다운 물결, 바둑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이 있어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 및 낚시꾼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변하여왔다.
  • (명)사형장(死刑場)
    청산도에 당리진이 설치되었을때 서남포(모래남)에 설치하여 죄수의 사형 및 처형시 이용하였다.한편 남문지로부터 약 20m 북쪽의 골목길 근처에는 마을공동우물로 사용하고 있는 우물이 남아있다.(鎭때 사용하던 우물)
  • (명)풍어제굿
    1994년 10월과 1995년 10월 남도문화재 완도군 대표로 출전하여 우수발굴상과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 (명)양진의숙(陽進義塾)
    면학당으로 1900년경에 설립되어 최초로 신학을 가르친 곳으로 김장열선생, 박흥곤, 위명량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일제시대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일제가 폐숙시켰다.

읍리

마을형성

읍리는 향교동에서 발굴된 돌칼과 고인돌(지석묘)의 유적지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현종 1670년경에 제주 양씨(濟州 梁氏)인 양우천(梁禹川)씨가 해남 어란에서 입주하였으며 동시에 경주 정씨(慶州 鄭氏)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지명유래

신라시대에 읍을 설치하였다고 하나 고증할 수 없고, 읍을 설치하여통치하였다 하여 속명으로 읍범미리(邑汎味里) 읍기(邑基)또는 향교동(嚮校洞)이라고 불렸으나 1759년 여지도서(與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기록을보면 읍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里名을 邑里라고 부르고 있다.

  • (명)청룡나무
    옛 선비 한분이 마을앞 들녘 한가운데에 나무를 72그루 심으면서 앞으로 이 마을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후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신라시대에 이곳에 읍을 설치하는 경사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명)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靑山鎭이 설치된 5년후인 1875년 당시 궁가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청산 주민들의 참혹한 생활을 묵과 할 수 없어서 읍리의 유지인 김전필 양재실, 양재일, 정덕성, 김필종 등 5일니 결의계(結義契) 조성(組成)에 합의하여 鎭의 5代僉使 1874년 서홍순을 방문하여 우선5개의 가역(苛役)만이라도 폐지해달라고 강력히 건의하여 주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 그 은공을 기려 비를 세웠다. 이 5人의 遺德을 후세에게 남긴 분들로 이분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문이 낡아 그 후손들이 기금을 마련하여 1995년 월 일에 전에 세워졌던 읍리(골기미)독베기에 前碑文을 원문데로 양현동씨가 작성 비를 세웠다.

구장리

마을형성

본리는 한일합병후 1914년 제주 양시인 양경수씨가 읍리에서 입주 절락농가를 이루어 "짼매"라 칭하고 차츰 입주자가 늘어남에 절량 농가인 10호로 읍리관활 1개반(7반)으로 편성하였다.

지명유래

1946년 해방직후 읍리(8반)에 속하게 되었으나 산악로의 조건으로 극단의 생활속에서 지내오다가 1961년 6월21일 5.16혁명 정부 수립과 함께 26호로 읍리에 분리하여 리명을 척산리라칭하고 1962년 1월5일에 기념탑을 세워 법정리명 구장리라 개칭하였으며 마을이 혼연일체가 되어 근면의 투지로 1963년 면 모범 마을에서 군 시범 마을으로 선정 자주, 자립, 협동정신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

권덕리

마을형성

권덕리는 조선 영조 16년인 1740년경에 읍리에서 제주 양씨인 양철운씨가 처음 이주하였으며 이후 함양 박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처음에는 읍리에 속해 있었으며 범바위가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리다가 고종 37년 1900년경에 권덕포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읍리에서 분리되면서 권덕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남쪽 바닷가에는 어족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은 천해의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여 1996년부터 관광유료 낚시터로 지정되어 외래 낚시꾼들이 모여 들고 있어 어촌계의 소득 증대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범바위(전 범바구 전설)
아주오랜 옛날 호랑이가 청산도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호랑이가 권덕리 산고개 재에서 바위를 향하여 "엉"하고 소리를 내어 포호를 하니 이곳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가 우는 소리 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는 '나 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여기에 살고 있구나' 하고 도망쳐서 그 후부터 청산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부터 이바위를 "범 바위"이라 부르고 있다.

청계리(淸溪里)

마을형성

청계리는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흔적으로 마을 뒷편 방죽깨에 3개의 집터의 울타리가 현존하고 있으며(지금은 그 자리에 묘지가 있음), 또한 마을 주변에 한씨 및 기타 미상의 분묘가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현재의 마을 형성의 유래는 조선 19대왕 숙종 46년인 1674년경에 충주 지씨(忠州 池氏) 29세손 지정남께서 해남군 현사면에서 건너와 슬하에 3형제를 두었으며 후봉(厚奉) 준백(俊伯)형제분은 청계리에서 성문(成文)하셨다. 영조 26년인 1750년경 경주 이씨인 이석동, 이석명씨가 충북 진천에서 건너와 마을을 형성하였고, 이후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 각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입주 당시에 마을의 지세가 노루가 뛰어노는 형국과 같다고 하여 장곡등(獐谷嶝)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22대왕 고종 13년 1876년 완도군이 설군(設郡)외면서 청계리라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명)팽나무-마을 입구에 사정(射亭)이 있으며 수령이 250여년 가량된 나무이다. 이터는 처음 이섬에 정착한 이석명씨가 주변 농토를 바라보기 위하여 만든 관망대라고 한다.
  • (명)청계제(淸溪齊)-지승문씨가 세운 조선시대 교육기관
  • (명)연묵제(淵默齊)-김용석씨가 세운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신풍리(新豊里)

마을형성

신풍리는 조선 효종때인 1650년대에 진주 강씨가 처음으로 들어와서 구성(舊城)터지에 자리를 잡고 살았으나 번성하지 못했으며 이후 조선 효종 1650년에 김해 김씨 감무공파(監務公派)인 김생춘씨가 영암에서 들어와 구성터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지명유래

정조 13년인 1789년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했을 당시 마을 이름을 구성리(舊城里)와 신교리(新豊里)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1896년 완도군이 설군 되면서 신풍리(新豊里)로 개칭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후기의 청산도의 지명을 보면 1759년에서 1789년까지 구성리,신교리 里名으로 나오고 1876년에 舊城里, 新豊里 청산鎭誌 기록에는 舊城里, 新豊里 2개마을로 기옥되어 있다. 행정구역 里名 호적대장에는 부흥리로 나온다.

(명)저수지
청산도는 사면이 바다인데도 해안을 끼지않은 마을로 농사를 위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1968년 23대 면장 김윤곤씨 당시에 설치한 저수지로서 마을의 논을 옥토로 바꾼 공이 크며 마늘산지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부흥리

마을형성

부흥리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1월 18일 노량진에서 왜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당시 부하였던 咸陽朴氏 而弘氏가 1600년경(병자생 16세 老通政大夫)강진에서 입도하였으며, 이후 김해 김씨, 제주 양씨, 강릉 유씨, 평강 채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높은산 깊은 곳이라하여 이 지명을 따서 안꼴이라 불렸으나 행정관할은 지금의 신풍리와 구성리에 속하여 이곳의 거주자들로부터 텃새를 심히 받아 다시 마을 이름을 변경하여 흥할(興) 마을이라하여 復興里라 명명하여 里名으로 부르고 있다.

양지리(陽旨里)

마을형성

양지리는 조선(영조36년) 1740년경 안동 권씨인 권득걸씨가 현 용치산좌에 동촌마을로부터 이주해와 정착하였으며 이후 숙종 26년 1700년경에 전주 이씨인 이득남씨가 대봉산좌에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청산도 지역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하여 1789년 강진현에 속할 당시「호구총수」에 의한 마을 이름은 양지리로 기록되었으며 1876년에는 양중리로 이후 1896년 2월3일 완도군 창설시 현재의 양지리로 명명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경부터 1960년대까지는 마을의 가구수는 65호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이농현상 등으로 40호만 남았으며, 예부터 양지리는 높은 향학열과 근면한 생활습관 등으로 많은 공직자를 배출하였으며 화합과 단결을 자랑으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행정구역 리명호적 대장에는 중흥리와 합구 양중리로 나온다.

  • (명)옥녀봉
    백련사옆 산50번지에 위치한 곧게 솟은 바위높이가 30m로 깍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시누이 옥녀를 미워한 올캐가 이곳 바위 끝으로 옥녀를 유인하여 절벽 밑으로 밀쳐 죽게 하였다. 그후 옥녀의 한이 서린 그 바위를 옥녀봉이라 하고, 골짜기를 옥녀골이라 하여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 (명)흰덜
    예날 신선들이 대봉산에 내려와 봉우리를 타고 까막산(烏山)의 일출일목을 구경한 다음 흰돌 무더기에서 놀다가 갓재(갈재)를 거쳐 다시 지심봉에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일명 신덜이라고도 하며 마을에서는 돌 한 개라도 반출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 (명)연자방아간
    1920년경에 절구통이나 맷돌로 곡식을 찧었던 당시에 우마의 힘이나 청장년의 힘을 이용하여 마을의 공동작업장으로 활용하였다. 마을의 공동 유물로 보존키 위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마을 사장에 있다.

중흥리

마을형성

중흥리는 조선 숙종대인 1677년경에 연안 차씨, 남평 문씨, 언양 김씨가 월경대사의 지시에 의하여 살던 중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이주하여 폐허가 된 후, 이조 중엽인 영조 2년 1726년경에 전주 이씨인 이태백씨가 강진에서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청산도에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동으로는 명두산, 남으로는 매봉산, 서쪽으로는 대성산으로 둘러싸이고 뒤로는 대봉산준령을 따라 오산이 병품처럼 펼쳐져 그 한복판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땅시인 1877년 고종 14년에는 중흥리(仲興里)로 부르다가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중리(陽仲里) 소속의 중흥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명)흔들바위(일명:농바구)
옛날 고명한 선비가 도사가 되기 위하여 바위 밑에서 백일기도를 하다 참지 못하고 99일째 되던 날 속세로 나와 버리니 그후부터 바위가 선비의 한을 달래기 위하여 "흔들 흔들"하였는데 지금도 그 한이 맺혀 있는지 큰 바위가 한두사람이 밀어도 흔들거려 슨들바위 또는 농바위로 부르고 있다.

원동리

마을형성

조선 哲宗 1860년 경에 상서리에서 언양김씨가 원동리 173번지인 지광웅씨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자리에 입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고종 7년 김해김씨 충주지씨 연안차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원동리는 1759년(영조38) ~ 1789년, 1776년 ~1800(정조13) 여지도서(與地圖書) 地名表를 보면 洞里란 지명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도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나 어느 성씨가 살았는지는 미상이다. 또한 '골리'라고도 하였다. 이 지명은 청계리에서 장곡등으로 가는 위치에 있다하여 골리라 이름하였다.

1896년 완도군의 설군과 동시에 상서리와 합하여 상동리라 칭하였으며 이후 1914년 3월 1일 전국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독립된 마을 이름을 으뜸원자를 앞에 하나 덧붙여 원동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제피나무꼴
    옛날에 어린이들이 돌림병으로 인하여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피나무를 각 가정에 꽃아주었다고 하며 제피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곳을 제피나무골이라 부르고 있다.
  • 진등
    마을에서 300m 떨어진 곳에 200년 이상된 큰 소나무가 있는데 어린이 등이 죽으면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하며 이후부터 해가 지면 도깨비가 잘 난다 하여 인적이 끊기니 곳이며, 이러한 유래로 "도깨비꼴" 또는 "진등"이라 하였으며 현재도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이곳 주위의 나무를 베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전해지고 있다.

상서리

마을형성

상서리는 상산포에서 들어서는 길목이다. 맨처음 청산에 입도할때 상산포에서 건너다 보고 매봉산이 높고 산세가 좋은 곳을 찾아 한씨가 "덜리"에 입도하여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만한 자료가 없으며 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덜리"로 전해오고 있어 덜리인 것은 틀림 없으나 60년대에는 10여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명유래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인 1759년(영조38) 1789년 조선 정조22대왕 1776~1800(정조13) 여지도서 지명표를 보면 射亭里와 桀里로(乞里 덜리로 추측됨) 1759년에서 1789년까지 나오고 1786년 조선 26대왕 고종 13년 호적 대장에는 乞里가 빠져 있으며 1895년 청산진지 고종3년 당리 진 때 기록을 보면 당시 상서리로 기록되어 있고 1914년 조선 행정구역 리명 일람표에는 상서리와 동리가 합구 상합리라 하여 오다가 1896년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상서리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05년 상서리에 살던 임두남씨가 목화 장사차 목포, 여수, 원산 등지를 배를 타고 항해 사던중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해안으로 밀려 완도읍 망남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망남리에 남아있다.

  • 사정(射亭)
    지금의 마을회간 옆정자 나무 밑에서 남산에다 표적을 두고 청장년들이 활을 쏘았다고 한다.
  • 싯거리재
    옛날에는 정월 보름날 싯거리재 중턱에 사당을 지어 온마을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산이 높고 험준하여 피맺힌 한을 달래는 고개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최근에 와서는 사당도 폐쇄되고 제도 지내지 않고 있다. 지금은 황무지로 변해 소를 방목하고 있다.
  • 꽁돌바위
    식거리재에서 바로 보이는 약 300m 떨어진 매봉산 중턱에 꽁돌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귀할멈이 여서리로 건너가기 위하여 싯거리재를 넘어가는 도중 "꽁놀이하기에 좋은 돌이 많아 놀이로 휴식을 취하다 하도 꽁돌이 좋아 몇 개의 돌을 치마에 싸고 여서리로 헤엄쳐 가다 돌이 하도 무거워 제대로 헤엄도 못치고 결국에는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촌리

마을형성

동천리는 신라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강원도 금강산내의 내금강 장안사에 동촌리 뒷산 절이 신주에 봉안된 것으로 보아 완도 청산도 동촌리에 사람이 살았다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록으로는 조선 숙종때인 1680년 연안 차씨인 차산립씨와 진주 정씨, 한씨 , 황씨 등이 입주하여 거주하였으나 차씨, 정씨는 조약도(지금의 약산), 생일도, 제주도 방면으로 이주하고 남은 후손들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한씨, 황씨는 거소가 불명하여 전부 흩어지고 그 후 김해 김씨, 안동 권씨등(1740년) 제성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지명유래

동촌리라는 이름은 청산도의 명산인 매봉산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동촌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꽁독바위
    동촌리 타구미 바닷가에 꽁독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귀할멈이 공받기를 하고 놀았던 곳이라 하여 꽁(공)덕 바위라고 이름앟여싿 한다.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이 돌공은 한 개의 무게가 200근 정도로 추측되는 둥근 모양의 돌로서 상석모양의 바위위에 놓여있다. 원래는 5개가 있었는데 마귀할멈이 2개는 치마에 넣어 가지고 바다를 건너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돌공 3개가 나망 있었는데 1959년 음력 8월 15일 호우를 동반한 시속 49.6 강풍 사라호 태풍으로 2개는 바다로 수장되고 현재 하나만 남아있다.
  • 청산도 세부측량 척두산
    1919년 일제때 이연회 완도군수 재직당시 맨 처음 청산도를 측량할때 동촌리 자머리(일명 잠머리)에서 기점을 잡아 세부 측량하였다. 권대형씨가 1756년 망 동촌리 척두산에 안장. 현지에 묘지가 있다.
  • 동촌리 봉수봉(烽璲峰)
    위치는 동촌리 뒷 상봉 작은 싯거리재와 큰싯거리재로 연결된 중간에 있는 이 산은 노적을 쌓아 올린 것 같이 보이는 산봉우리이다. 이봉우리에 청산진 당시 1866년 경에 설치된 이봉수봉은 돌로 쌓아 설치된 축성이다. 비변사 등록 251권 고종3년 8월 조에 동촌리 봉수대를 설치하였다라고 적혀있다. 태평양 전쟁당시인 일제 때 1943년 경에 이곳 봉수봉자리에 감시대(간시다이)를 설치 집을 짓고 축성을 보수 감시원을 파견하여 해상을 관망하였다. 지금도 그 자리에 집터와 축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무사 유명인사 배출마을
    청산면 동촌리는 옛날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동촌 마을 윗 동편에 사정을 설치하여 궁자응로 무사를 양성하였으니 사정에서 무사 훈련을 연마한 차계린이 1873년 고종 10년 청산진 4대 첨사 박인원 재직당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1년 청산진 19대 첨사 이종호 재직때 차홍린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무사 2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애국열사 이흥쇄씨도 이마을(부친 출생지)출신이다. 청산 1대 면장 차상집 2대 권재윤 13대 15대 차진영 면장과 고흥 함평 차세영 군수를 비롯하여 청산면 협의원 정운조 지방자치시대에 1대 면의원 권급주 2대 3대 김득윤씨가 면의회를 주도했다는 등 마을 사람들의 자랑 또한 대단핟.

신흥리

마을형성

신흥리는 조선 숙종(1675 ~ 1720년)에 당시 사정리(현 상서리)의 덜리에서 연안 차씨, 언양 김씨 등이 해안을 따라 해초와 고기잡이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며 조선 17대 효종대에 언양 김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지명유래

입주당시의 마을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59 ~ 1789년의「호구총수」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면 해의리와 신흥리로 되어있으며, 일제시대에는 불당곡(상산포)과 해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1896년의 호적대장 상의 기록에 신흥로 표기된 것을 근거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처녀 흰쌀 3말 못먹고 시집간다
    옛날에는 신흥리 마을이 하도 가난하기로 유명하여 딸이 시집갈 때까지 쌀 3말을 못머고 시집간다고 하여 신흥리 처녀 쌀 3말 못먹고 시집간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 보리마당
    신흥리 상산포 위 진산리로 넘어가는 평탄한 곳이 있는데 이를 지칭하는 말로 옛날 주민들이 공동으로 보리를 타작한 마당이라 하여 보리 마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그곳에서 약 500m 진산리로 가는 길에 위치한 물벅은 고랑이 있는데 옛날 밤이 되면 어린애 울음 소리와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 사람을 헤친다고 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밤만 되면 혼자 가지 않는 곳이며 무서운 곳으로 소문나 있다.

진산리

마을형성

진산리는 조선 영조때 나주임씨 임창진씨가 1751년에 나주 회진에서 부친이 별세하자 장흥 위씨인 어머니를 따라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이후 언양김씨, 초계최씨, 관산위씨 등이 차례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최초의 마을 이름은 양지촌, 음지촌 버던으로 마을이 위치한 지형에 따라 불렸으나 1789년 강진현에 청산도가 속해 있을 당시에는 진산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1876년 호적 대장에는 국화리와 합하여 국산리라고 불렀으며 이후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의 진산리로 개칭하여 현재 이르고 있다.

갯돌밭
버던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펼쳐진 갯돌은 여르 피서철 해수욕 및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많은 인파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각종 양식시설이 설치되어 어민들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국화리

마을형성

국화리는 조선 인조 8년인 1630년경에 초계 최씨가 난을 피하여 입주하여 거주하였다고 하나 고증할 수 없고, 1789년의 기록을 보면 굴거리라고 호칭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영조대인 1750년에 이르러 장흥에서 살던 관산 위씨인 위명만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지명유래

마을 형성 당시의 이름을 알 수 없으며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의 「호구총수」의 기록에 의하며 굴거리로 되어 있으며, 1896년 완도군 설군당시에는 지금의 진산리와 합하여 국산리라 되어 있고, 1914년 3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재의 구활리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마을 뒷편으로는 가마귀 오산, 우측으로는 방마산, 여형형태로 된 금산이 초변의 협곡으로 편풍치듯 둘려짜여 호위하고 있으며 마을 형태가 말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마을 주변에 국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가을이면 들국화가 만발하여 있어 국화리로 이름하였다는 설도 있다.

  • 각시샘
    마을 입구에 조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이 샘에서는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예쁜 각시가 나타나 물을 뜨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난 후로는 마을 아낙네들이 첫닭이 울고난 뒤 샘에 나갔다 하여 이 샘을 각시샘이라 부르고 있다.
  • 용왕제
    매년 정월 초하루날 남녀노소 전 마을민이 새벽에 목욕재배하고 마을앞 바닷가에 나가 풍어와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모시고 있으며 낭장망 멸치어장이 형성되어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지 리

마을형성

조선 인조말엽 1640년경 김해 김씨가 강진에서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숙종시대에는 지리의 중앙에 사정을 설치하여 궁장으로 무사를 양성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변에 나무를 식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처음 마을을 형성할 당시에는 마을 중앙에 큰연못이 있어 못김이라고 칭하였으나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인 1789년에는 지구미리라 불렀으며 이후 고종 13년인 1876년에는 호적 대장에 지리라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쏠지개
    지리 중앙에 사정을 설치하여 청년들의 심신을 단련케 하였으며 남쪽 음지에서 활을 쏘았다하여 쏠지개라 부르고 현재가지 전해오고 있다.
    ※해수욕장 방품림 : 전포해변에 인력으로 뚝을 쌓아서 해수를막고 소나무를 식목하여 현재와 같은 훌륭한 방풍림이 육성되었다.
  • 인재육성
    문맹을 없애기 위하여 속칭 서당골에 서제를 설치하고 육지에서 유명한 학자이신 안락빈선생을 초빙하여 이내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청산면사무소에 세운 애향비문과 농협청사 정문에 세운 농협찬가 청산카훼리호 취항기념비문은 이 마을 출신 김병욱씨가 지은 글이다.
  • 發起文
    유구한 역사를 가진 본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40년전 김수로왕 62세손의 입도를 시초로 그 후 객개 시족들이 입도하여 집단군거생활을 하며 군락을 형성하고 공동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이로 곤한 모든 발전과정에서 국가적, 민족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인간사회는 점차로 복잡의 도가 가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객개 시족간의 역대는 숭상하면서도 마을의 변천과정을 史蹟은 없고 외형은 있으나 內實이 없는 空虛한 현실앞에 의식있는 많은 분들이 역사 보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共惑하고 수대에 물려줄 사적을 整備코저 이에 발기한다.

장도

마을형성

장도에 조상이 거주한지는 약200년 전으로 장도에 처음 입주한 조상은 황, 김, 최, 이, 정씨 17세대주로 인구도 160명에 다다랐으나 현재는 11세대 40명이며, 현재 거주하는 사람은 29명이며, 11명이 유학 중인 학생이다.

지명유래

섬의 형태가 길어서 이름을 장도라고 하였다. 장도는 어미 섬인 청산도 지리에서 0.5㎞ 떨어진 면적 0.196㎢의 섬으로 행정구역상 지리에 속해있다. 북위 34도 12분 11초 동경 126도 51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산도 본도에서 약 200m 정도 덜어져 있으며 낚시바늘 모양 도한 황소가 누워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 작고 아담하나 전형적인 자연의 섬이다.

지명도

마을형성

1960년에 어업이 번성할 때는 300호 가까이 살았으나 어족의 고갈로 젊은이들은 타지로 이거하고 1995년 가구수 56여가구로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살고 있다.

지명유래

高麗祖 穆宗 10년 정미년에 탐라해상에 우연한 지동이 7일간 계속하더니 수일만에 雲霧가 없어지고 전에 없던 거산이 해상에 솟아났다고 하였다. 이 소문으로 안 조정에서 지도를 작성하게 하고 서산이라 명명하였던 것인데 그것이 현재의 지명도로 천지개벽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다.

모동리

마을형성

삼별초(1270~1273)란 당시에는 소안주민의 용감한 방위로 평안한 섬이었다하여 소안도라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조선조 인조 이전에 모도에도 주민이 입주하여 강진현에 속했었으나 조선조인조(1623~1627)년대에 마, 방, 이천서씨 등이 처음 입주하였다가 마, 방씨는 타지역으로 이거 하고, 추계추씨, 김해김씨, 경주정씨, 경주이씨, 오씨등이 입도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부분적인 지명으로 보아 인조조이전에 입도하여 생활하여왔음을 알 수 있다.

지명유래

1804년 조선순조 4년 화양조서(토지소유권신청)당시까지만해도 모도면이라 칭하였다는 설과 조서에 면이라 쓰여 있으나 1913년 3월 1일 완도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산면에 전입되었으며 면적은 전 35㏊, 답22.5㏊, 입야 25.5㏊ 등 총 312.5㏊이다. 1970년만 해도 107호에 7000여명의 주민이 살아왔으나 2000년 정월 현재 54호에 100여명의 주민이 살아오고 있다.

모서리

마을형성

1600년경 마,진씨가 입도하였으며 그 후 천, 서씨가 입도하여 정착하였다. 년대를 알 수 없으나 이후 김, 최, 문, 장, 정, 이, 갑, 신, 조, 만씨 등이 입도하였다.

지명유래

처음 입도시에는 현 작은마을 상층에 터를 잡고 거주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토성리라 하였다. 인구가 증가하여 큰 마을에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을 작성리라 하였으며, 섬에 띠가 많아 디섬으로 불렀으며 섬의 서쪽에 위치하여 모서리로 통합하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청룡끝의 칭호나 현재 큰마을 집터 등지에 조개껍데기가 묻혀져 있는 것을 보면 작은 마을이 먼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북리

지명유래

완도에서 남으로 6마일 거리에 작은 섬이 있다. 동으로 대령산 남으로 불선봉 서쪼긍로 등대가 있는 섬이다. 섬이 작아 작은 섬이라 하였으며 옛부터 띠가 많아 띠섬 또는 소모도러 칭하였다. 리명은 해방전에는 모도리내 소모도리라 하였으며 해방후에는 모북리라 칭하였다.

여서리

마을형성

1690년대 진주강씨가 처음으로 입도 정착했으나 그 후 정씨, 김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

일제시대에는 태량도라 하였고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으나 그 후 려서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산도에서 직선거리로 약 25km 떨어져 있으며 송곳같이 둥글게 생긴 원추형의 여호산이 여서도 중앙에 우뚝 솟아 있고, 해변의 기암괴석과 다양한 수종의 난대림이 어우러져 빼어난 풍경을 지니고 있다. 특히 어족이 다양하고 감성돔이 풍부하여 섬 전체가 최고의 갯바위 낚시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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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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