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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마을유래

장용마을(藏龍)

서기 1326년 강진군 원포에서 경주정씨가 아들 8남매를 데리고 지금의 정가섬에 입도하였으며 장남, 차남, 삼남은 타지로 이주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 나머지 5남매는 지금 藏龍, 九成, 竹仙으로 각각 분산 거주하여 오씨, 김씨 등과 결혼하여 생활터전을 닦아 현재 경주정씨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으며 그후 타성씨가 입주하여 생활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 한가운데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이 길을 머금고 있다고 하여 이를 근거로 탄도리(呑道里)라 하였으나 1913년 죽선, 구성, 가래리를 합하여 장용리라 칭하다가 해방 후 다시 분리하여 현재 마을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설

장용산이 위치한 중앙에 약 3㎢의 분지가 있으며 위에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영조때 세 성씨가 살았던 곳으로 세군데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으며(가래, 죽선, 상득 방향) 이를 삼개문(三開門)이라 칭하는데 이 삼개문 안에는 3세대 이상이 살 수 없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은 구집터만 남아 있다.

구성마을(九成)

마을형성

1326년 강진군 원포에서 정치경씨가 지금의 무인도인 정가섬에 입도하여 생활, 아들 8남매 중 4남이 본 마을에 이주, 박씨, 오씨 등과 결혼 생활, 거주를 시작하였다.

지명유래

마을 정면에 보이는 산맥의 지형이 아홉 개의 산맥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여, 처음에는 구성물이라고 하였으나 해방 후 장용리에서 분구하면서 구성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선마을

마을형성

정조대에 밀양박씨가 처음 입주하였는데 그 후 타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에 큰 대나무숲이 있다고 하여 처음에는 대생리로 부르다가 1946년 해방 후 장용리에서 분구하면서 죽선리로 개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가래마을

마을형성

영조시대에 남원 방씨 방동기 씨가 처음 입도하였으며 그후 해주오씨, 동천 최씨, 죽산 안씨 등이 거주하였다.

지명유래

작은개, 초분골, 셋터, 선창물 등이 위치하였다하여 처음 마을 이름을 가리라 불러오다가 장용리에서 죽선, 구성리를 구분하면서 현재 가래리라 불리고 있다.

우두마을(牛頭)

마을형성

1750년경 남원양씨 양달호(梁達浩)가 함평군 학교면에서 맨 처음 들어와 생활터전을 마련하였으며 경주이씨의 딸과 결혼하여 두 형제를 두었으나, 한 사람은 사망하고 한분이 생존하여 현재 11대손에 이르렀으며 그 후 천안전씨가 입도, 전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타성씨도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소우(牛)자를 써서 쇠머리라 칭하다 해방 후 우두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동마을

마을형성

1856년경(영조대)에 경주 金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나 그 후 장씨, 최씨, 황씨 등 차례로 이주하면서 생활터전을 만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마을에 위치한 불당허(佛堂墟)가 있어서 처음에는 선운동(仙雲洞)이라 하였으며 1886년에는 당시의 마을 형태가 여자형이라 해서 여동계라고도 불리우다가 우두리에서 분구하면서 여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석기 때 부터 불을 일군 유적지가 있어 대장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화가마을(花加)

마을형성

효종대(孝宗代)에 처음 죽선안씨가 입주하였으나 거주하지 않고 곧 이거하였으며 그 후 연안차씨인 차맹의(車孟議)씨가 1720년 완도군 신지면에서 입주하여 생활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마을이름을 처음에는 괭과리라고 하였으나 꽃가루가 많이 산재되어 있고 지형이 꽃잎과 같이 생동한다고 해서 화가리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동마을(泉洞)

마을형성

1926년경에 전남 나주에서 장명신 씨가 경주이씨와 함께 최초로 입주하여 생활터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장씨와 차씨가 씨족을 이루고 있으며 타성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는 5일장이 활발하게 성행되었던 장소이며 1980년 초 이후는 폐장이 되었다.

지명유래

옛날 마을안에 샘이 있었는데 샘물맛이 좋아서 마을 이름을 천구미(泉口味)라 하였다가 해방 후에 우두리에서 분구하면서 천동리라고 칭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넙고마을(芿古)

마을형성

지금부터 약160년전 경주정씨, 남평문씨 등이 맨처음 입주를 시작하였으나 곧 이주하고 한양조씨(조근창)가 지금의 함평군에서 입주하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원천이란 아들을 낳아서 더욱 씨족이 번창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왔다. 그후 타성씨가 입주하여 생활을 시작하여 더욱 마을이 번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 뒷 북쪽에 옥(玉)이 나오는 옥산(玉山)이 있어 옥산리라 하다가 해방후에 우두리와 분구하면서 넙고리라 개칭하였다. 옥돌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넙고리와 장흥군 옹암리을 잇는 구 나루터가 있어 뭍과의 교통수단을 엿볼 수 있고, 활목이 있는 바, 군사들의 조련터였음을 알 수 있다.

관산마을(冠山)

마을형성

최씨, 추씨, 윤씨, 송씨 등이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 형성시에는 대나무가 많아 죽리(竹里)라 하였다가 섬사람들이 모이는 도회청(도청)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도청리라고도 불리다 관청리 관상리로 개칭하였으며 해방후 관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관서마을(冠西)

마을형성

만봉산 밑의 불당골에서 최초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구터, 밤낭골, 덤밭골, 간대골 등에서 고인돌 유물로 보아 고조선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 한 것으로 판단된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엽부터 윤씨, 장씨, 송씨, 최씨, 강씨 등이 거주 시작하여 그 자손들이 현재도 거주하고 있다.

지명유래

웃모실, 포랜나리, 등너메, 통셈거리, 도청, 야중죽리, 간대골, 새터 9개촌으로 형성, 마을로 관리되다가 일제시대 동네 중간으로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서쪽에 위치한 상존(웃모실), 태동(포랜나리), 등촌(등너메), 도청(통셈거리)을 관서리라 하였다. 한때는 이관산리라 불렀으며 고금면에서 약산면으로 분면시 개명되었다.

관중마을(冠中)

마을형성

최씨, 추씨, 윤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여러성씨가 들어와서 번창하였다.

지명유래

관산리와 관서리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관중리라 칭하였다.

신기마을(新基)

마을형성

효종(孝宗)때 최씨, 장씨, 박씨 등이 처음 입주하여 생활하였고 1916년 고금면과 통합시 관산리에 소속하였으나 그 후 분구하여 타성씨 등이 입주하였고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여 1985년 3월 1일 새로 터를 잡아 새터라 하였으나 1958년 관산리에서 분구 후 신기리라 마을명을 칭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형이 따스한 아열대성 기후로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새로 터를 잡는 곳이라 하여 샛터라고 하다가 1958년 3월 1일 관산리에서 분구와 동시 신기리라 하였다.

구암마을(鳩岩)

마을형성

약 1351년 최씨 입도지로써 추씨가 처음 이주하였으며 그 후 여러 성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에 돌이 많아 산의 바위가 비둘기 형상으로 있다고 해서 꾸돌바라고 부르다가 관산리와 분구되면서 구암리라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득암마을(得岩)

마을형성

조선 효종대에 추씨, 송씨, 강씨 등이 처음으로 이주하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 여러 성씨가 입주하여 현재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명유래

마을 주위에는 돌이 많이 산재되어 있어 어둥굴이라 칭하다가 해방 후에 상득암리와 분구되면서 득암리로 명칭을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득암마을(上得岩)

마을형성

효종대에 추씨, 강씨, 송씨 등이 처음 입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하였으며, 차츰 타성씨가 입주하여 생활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 주위에 많은 돌이 산재해 있고 어둥굴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웃어둥굴이라 부르다가 해방후에 득암리와 분구하면서 상득암리로 개칭하였다.

사동마을(沙洞)

마을형성

경주정(鄭)씨가 청산으로부터 들어와 생활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지명유래

마을 서쪽해변에 모래와 자갈이 많이 있어 작살구미 또는 진박골이라 명명한 것이 구전되어 오다가 1968년 득암리에서 분구하면서 현재의 동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해동마을(海東)

마을형성

숙종대(肅宗代)에 김씨, 윤씨가 처음 입주하여 생활하게 되었으며 그후 여러성씨가 입주하였다.

지명유래

처음에는 새로운 부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해서 신흥리라 칭하다가 동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해방후 가사, 어두, 당목, 신흥을 합하여 해동리라 칭하게 되었다.

당목마을(堂木)

마을형성

정확한 정착시기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약 300년 전에 박씨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 입도하여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여 살아 왔는데 인근 정착민들보다 더 협동심이 강하여 타 마을 보다 빠른 시기에 마을을 형성하여 생활하였다.

지명유래

옛날에는 고흥군과 금일을 연결한 포구가 있어 포촌이라고 하엿다가 당과 수목이 있어 당목리라고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두마을(漁頭)

마을형성

영종 때 박씨, 김씨, 권씨가 처음 입주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지형이 고기머리형으로 형성되어 있어 처음에 어두지라고 하였으나 광복후에 해동리에서 분구하면서 어두리라고 하였다.

가사마을(加沙)

마을형성

효종대(孝宗代)에 이씨, 홍씨가 처음 입주하여 생활하다 그후에 다수의 김씨 및 타성씨가 생활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에 불자(佛字)가 2개 세워져 있어 가사동(袈娑洞)이라 하다가 불자(佛字)가 없어진 후 해동리에서 분구하면서 가사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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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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