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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유래 및 연혁

군외면의 유래

완도읍과 같은 권역(圈域)에 속해 있었으나 고려 현종 때부터 1855년(정종 6년) 까지는 현재의 군외면(郡外面) 관할구역이 삼분(三分)되어 대창리(大昌里),영풍리(永豊里),불목리(佛目里), 사후도(伺候島), 고마도(古馬島), 토도(兎島)는 강진현 (康津縣)에 속했으며, 남선리(南仙里),황진리(黃津里),용계리(龍溪里),중리(仲里) 달도리(達島里)와 기타 도서는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고, 당인리(唐仁里)에서 원동(院洞)까지는 해남군 은소면(海南郡 銀所面)에 속했었다.

그후 加里浦鎭이 獨鎭되면서 1855년부터 東西 兩面으로 갈라서 郡外面을 외면(外面) 이라고 중분리(中盆里),정돌리(正突里),화개동(花開洞),부흥리(復興里),대구미(大口味), 신정리(新亭里), 당인리(唐仁里), 두읍리(斗邑里), 삼장리(三莊里), 갈문리(葛文里) 화학동(化鶴洞), 대산리(大山里), 신흥리(新興里), 방축리(防築里), 망리(望里), 석장리 (石場里), 도암리(道岩里)를 관장했었다.

1896년 2월3일 완도군이 설군(設郡)되면서 외면(外面)을 군외면(郡外面)이라 개칭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야리(大也里),영풍리(永豊里),불목리(佛目里),황진리(黃津里) 원동리(院洞里)를 군외면의 관할로 한 반면에 신정리(新亭里)에서 망리(望里)까지의 지역 을 군내면(郡內面)으로 이전하였으며 신정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대문리(大文里)로 옮겼다가

1917년 대문리에서 면사무소를 원동리 현위치로 신축이전하였다.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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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외면 마을별 연혁정보를 제공하며 마을명,위치,연혁,지명유래 항목으로 구성된 표
마을명 위치 연혁 지명유래
사후 군외 동쪽 섬지역 인접마을 대창리 대야리 조선 효종 때 제주도로 귀양 가던 박씨, 양씨가 처음 섬에 들어와 정착 모래가 많고 까마귀가 많다 하여 처음에는 사조도라 하였으며 주위에 달도(達島)가 있어서 사위를 뜻하는 사후도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옛날에 섬 입구에 마도진이 있었고, 이곳에 사후선(정찰배)이 있었던 자리여서 사후도로 불렀다는 설도 전해 온다.
고마 군외 동쪽 섬지역 인접마을 불목리, 영풍리 조선시대 숙종 때에 김해김씨, 이씨, 조씨 등이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 조선시대 초기에 이 마을의 “서끝”에 마도진이 설치 되었으나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강진현 마량으로 진이 옮겨 가면서 옛마진 이라고 이름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하여 고마도라 칭함.
토도 군외 북쪽 섬지역 인접마을 해남 북평 갈두리 이조 선조대인 1586년 양천 허씨가 처음으로 이섬에 들어와서 3대를 거치는 동안 서씨와 고씨가 이주해와서 조그마한 섬마을을 형성함 섬의 생김새가 토끼가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토도라 불렀다고 전해짐.
흑일 군외 서쪽 섬지역 인접마을 당인리 백일리 1735년 백일도의 입도조의 차남이 처음으로 이주하였고 그후 강릉 유씨가 들어와 차차 마을을 형성 백일도의 서편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흑일
백일 군외서쪽 섬지역 인접마을 당인리 흑일리 조선 숙종때에 신안주씨가 처음으로 이섬에 들어온후 강릉 유씨가 이주해 마을형성 맑고 깨끗한 바닷가의 하얀 모래와 차돌이 빛을 발하여 육지에서 보아 황홀한 천국을 이룬 깨끗한 섬
대창1구 군외 동쪽끝지역 인접마을 대창2구,영풍 이조숙종대에 창령 조씨가 정착 1945년 대창1구 로 개칭 옛날에 선창가에 창고가 있다하여 선창 구미라고 부르다가 대창리로 개명 대창마을로 부르고 있다
대창2구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대창1구, 대야2구 1890 광산김씨 가 정착 1945년 대창2구 로 개칭 이명으로 하대수 마을 앞산에 동굴이 있어 고대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옛날에 선창가에 창고가 있다하여 선창구미 라고 부르다가 대창리로 개명 대창마을로 부르고 있다
영풍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대창1구, 불목 1686년 김,이,박, 조씨의 4성이 정착 마을이름을 띄등이라 하였는데 고금에서 유배 되었던 이도신씨가유배생활을 마치고 전라 감찰사가 되어 이곳을 순시하던중 도화가 만개 하여 있고 아름다운 들판에서 수동들의 피리 소리를 듣고 주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영원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라하여 영풍리로 부르게 되었음
불목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영풍, 영흥, 교인 숙종대 김해김씨 가 정착 마을위에 큰 바위가 스님이 꿈꾸는 마을이라 하여 佛夢里, 佛木里라 불렀다가 근세에 불목리 라부르게 되었으며 원불교 수련원이 있어 매년 원광대학생과 학생, 신도들의 수련장으로 이용
영흥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불목, 남선 이조대 김해김씨 가 정착 숙승봉의 스님이 배가고파 아랫마을에 동냥을 와서 보니 덕이 있다고 하여 덕운, 용의 형국과 같다는 용소, 신선이 숨어 있다고 하여 3개동 으로 구성되었으며 불목리에 속해 있었으나 해방후 영흥리라 부르게 되었음.
남선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영흥, 교인, 황진 이조대에 경주최씨, 광산김씨가 정착 앞산에 진달래 꽃이 만발하고 들에는 꿀벌들이 분분하여 뒷동산에 올라가 마을의 형국이 꿀벌 같다하여 밀봉리라 하였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분동하면서 남설리로 부르게 되었음. 옛날에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가 있어 해남과 강진방면의 길손을 운송하였음.
교인 군외 동쪽지역 인접마을 불목,영흥, 황진,용계 1870년 임형기씨 가 정착 화전민들이 널따란 돌을 마을에 깔아 놓았는데 첨사가 행차하다가 이바위 위에 쉬면서 “관들”이 라고 불렀고 관내 최초의 학교가 있다고 하여 교인리로 부르게 되었음.
황진 군외 북쪽지역 인접마을 황진, 원동 1700년경 김해김씨 가 정착 완도의 금송봉산(禁松捧山)으로 산림보호와 그 관리를 위하여 황장소(黃腸所)를 설치하여 황장목이 수시로 입출항 되었다. 그러기에 황장진 또는 황정리라 하였고 훗날 황진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중리 군외 북쪽지역 인접마을 황진, 원동 1700년경 김해김씨 가 정착 황진리에 예속된 마을로서 해방을 맞이하여 불당골, 신덕, 중간마을이 합하여 한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큰동네와 같이 잘 살 수 있다고 중리라고 부르게 되었음.
원동 군외 북쪽지역 인접마을 중리,달도, 망축, 신흥 이조대에 김해김씨 가 정착 이조중종 17년 경주정씨원님이 부임하면서 “옹개”에 원을 설치하였으며, 그후 원님이 거주 하였던 터라 원터라 불렀으며, 완도설군으로 면의 중심으로 변하여 육지를 왕래하는 교통 중심지의 포구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원포라 하였다가 일한말에 원동으로 부르게 되었음
달도 군외 북쪽끝지역 인접마을 원동, 해남 남창 고려때 문씨, 최씨 가 정착 풍수지리학을 응용하여 배의 달과 같이 생겼 다하여 닻섬이라 불리우다 설군이후 달도리라 부르게 되었음.
신흥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원동, 망축, 초평, 대문 선조대 밀양박씨 가 정착 초야를 이루어 살았다하여 초전리로 불리우다 충청도 박씨란 지관이 이곳을 지나다 살펴보니 지형이 학의 형국이라하여 신학리라 하였다가 일제말 신흥리로 부르게 되었음. 마을 중앙에 큰못이 있어 둠벙치라는 별지명이 있음.
망축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신흥, 초평 선조대 신창표씨 가 정착 뒷산에 마주봉이 있어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다 하여 학문을 즐기며 마주봉과 함께 후손들이 성대를 이루겠다는 뜻으로 망축리라 부르게 되었음.
용계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교인, 초평 1600년대 선조대 김해김씨가 정착 마을시내의 상단에 용이 살다 승천하였다는 용지가 있고 그 밑에 위치한 용암사라는 절이 있어 용계라 부르게 되었음.
초평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용계, 신흥, 망축 선조대 평안문씨 가 정착 번던이라는 고유지명이 있었는데 제주에서 많은 말들이 한양으로 가던중 마주산과 청등골산의 들판이 자생초로 우거져 있어 말을 임시 사육 하였으며 그 지역이 크고 넓어 번덕지라 하였 다가 초평으로 부르게 되었음.
대문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초평, 신흥, 갈문 선조대 신창표씨, 김해김씨가 정착 큰 산 아래 큰 인물이 나온다는 뜻으로 대산 리라 불렀다가 해방후 글은 배우는 사람이 있어야 큰 인물이 나온다해서 대문리라 부르게 되었음.
갈문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대문, 삼두 영조대에 성주배씨, 제주고씨, 청주한씨 가 정착 마을뒷산에 칡이 많다고 하여 갈문리라 부르게 되었음.
삼두 군외 서쪽지역 인접마을 갈문, 당인 숙종대에 밀양박씨 가 정착 처음에 두읍리라 하였던 마을을 일제초기에 삼장동과 두읍리를 합하여 삼두리로 부르게 되었음.
당인 군외 서쪽끝지역 인접마을 삼두, 완도 대신 숙종대에 양천허씨 가 정착 마을에서 대인이 출생할 것이라는 구전에 의해 대인리라 하였으나 일제때 당인리로 부르게 되었음.

마을유래

원동리(院洞里)

1522년(中宗 17년)군내리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진된후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속칭 "옹개" 에 院집을 세웠던것이다. 원집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원동(院洞)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옹개원터라고 하여 지명이 전해 오고 있다. 1917년 신정리에서 대문리를 경유하여 이전되어온 군외면사무소의 소재지가 되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발전 되었다.

완도군의 관문이며 완도교가 1,2차로 가설된 연륙기점 마을이다. 제1차 가설된철교는 6.25때 파괴된 한강 철교의 잔해를 보수하여 만든 핀트러스형으로 1969년 1월31일 개통하였으며, 교통량의 증가로 인하여 1985년 2월에 새로이 대교를 준공하여 현재는 별로 사용 가치는 없으나 6.25동란 전화의 유물의 관광상 보존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밖의 원동내 명칭에는[원계/선창/고두머리/장등/안동네/개추/갯제/중산골 등] 이 있다

달도리(達島里)

달도에 최초로 입주한 성씨는 문씨,최씨이고 그후 경주김씨, 김해김씨가 들어와서 현재 많이 살고 있으며 다른성씨도 거주하고 있다. 웃마을인 해남 이진은 성을 싸서 진을 치고군사가 있다하여 이진이라부르고 닻도는 배 닻같이 생겼다하여 닻도라 불렀다. 그후 영안군에 편입하여 달호라 불렀다가 현재는 완도군에 편입되어 달도라 부르고 있다.

달도는 옛날에는 양쪽다리가 나있지 않고 섬으로 되어 있어 사람을 나룻배로 실어 날랐다 하여서 섬도(島)자를 써서현재는 달도라 부르고 있다.

달도내 명칭 천석바위/아리꽁지/망매산/봉화불/당끝/당/당제/갯제/용왕제/불무동/웃꽁지/숭어바위/몰마기미/안산기미/코바위/당유례/염수/둥굴재/큰골/작은골/약샘/동섭바위/동백나무개 등

중리(仲里)

조선 숙종대에 정씨의 후손이 황진리에서 분가하여 이주한후 마을이 형성 되었다. 황진리에 소속된 마을로 해방후 1946년에 불당골간데마을신덕 을 합하여 한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큰동네와 버금가는 잘사는 마을이 될수 있다고 중리(仲里)라고 불렀다.

그외의 명칭 장군바위/불당골/이월례원장/하루바위/청둥고랑 등

황진리(黃津里)

조선 효종때에 경주 정씨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마을을 형성 하였다. 완도의 금송봉산(禁松捧山)으로 산림보호와 그 관리를 위하여 황장소(黃腸所)를 설치하여 감색,산직 등 50명의 이질을 두어 산림을 감시 보호 하면서 범법자를 징계하고 육림하는 한편 주로 황장목을 수집 진상하는 업무에 진력하였으므로 황장소인 이곳에는 황장목이 수시로 입출항 되었다. 그러기에 황장진 또는 황정리라 하였고 훗날 황진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외의 명칭 오름/독개끝/독총골 등

황장목의 전설

황장목이란 수백년 수령의 홍송으로 나무속에 송진이 가득베어 썩지 않는 나무인데 옛날 우리 완도에는 이러한 황장목이 울창하였기에 조정에서 완도산을 국유로 봉하고 민간의 입산을 엄금하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에 해남 송지에 고효자라고 세평을 받은 효자의 편모께서 노병으로 별세 하였는데 가세가 빈곤하여 관재를 준비치 못하고 비통과 걱정에 빠져 통곡중이었는데 집에서 기르던 큰 삽살개가 끙끙거리며 고효자의 바지락을 물고 끄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고효자는 개를 따라 나서자 남창 나루까지 인도하여 완도로 건너가자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갈 배가 없어서 방황중인데 이번에는 삽살개가 고효자 앞으로 다가 서면서 등에 업히라는 시늉을 계속하니 어쩔수 없어서 업히어 완도로 건너 왔었고 개는 다시 주인을 안내하여 특상품관재가 될 큰 황장목 곁에 머물렀다. 고효자는 그 황장목을 보고 욕심이 났으나 새로이 걱 정이 된다. 벨 연장도 없고 혹 연장이 있다한들 거목을 베기가 너무 힘겨운 일이며 완도의 황장목은 국법으로 벌목을 엄금하고 있음을 아는지라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한 고효자는 앞이 캄캄하여 설움만 복받쳐 통곡을 억제치 못하고 엉엉 울었던 것이다.

그럴즈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의 가리포진 첨사는 이선원 이었는데 이첨사가 격무에 시달려 어슴푸레 낮잠 졸음의 찰나 비몽사몽간에 통곡하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 오는 것이다. 졸음에서 놀라 깬 이첨사의 귀에는 여전히 통곡이 계속 들려서 사령을 불러 "울음 소리의 출처를 알아 보라"고 명령 하였다. 사령은 근방을 살펴본후 "근처에는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이첨사의 귀에는 계속 통곡 소리가 들리니 이상히 여긴 첨사는 사령들을 뒤따르게하고 통곡이들리는 방향을 향하여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기이한것은 조금가면 그옆에서 또 더가보면 또, 그옆에서 곡성이 들려 기어히 곡성이 나는 곳까지 당도해보았다. 거기는 상황봉 중턱이었다.

낙낙장송이 하늘을 찌를듯 울창한곳으로 큰 황장목곁에 황소처럼 큰 호랑이 한마리와 울고 있는 젊은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이첨사는 땀을 닦은후 우는 젊은이를 달래며 사연을 물으니 젊은이는 경건히 인사하며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이첨사는 고효자가 범을 개라고하는 말에 예사효자가 아님을 깨닫고는 고효자를 달래며 "내일 우리가 관을 만들어 보내줄것이니 아무걱정말고 지금건너가 어머니 장례를 정성것 모실 채비를 하십시오"하고 귀가 시킨 이첨사는 약속대로 그황장목을 베어 관을 만들고 쌀과 제찬등을 갖추어 고효자의 집으로 조위사를 보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고효자의 지극한 효심이 감천되어 삽살개는 호랑이로 변하였고 고효자의 애절한 곡성은 멀리 30리 밖의 이선원 첨사의 졸음을 깨웠던 것이다. 이는 (효는 백행지본으로 하늘도 감동 한다는 진리)임을 세인들에게 가르쳐주는 좋은 예의 전설이다.

교인리(敎仁里)

교인리는 완도군에서 해발 180m의 고지에 위치한 제일 높은 마을이다. 원래 국도가 원동에서 출발하여 완도읍으로 가는 첫 마을이다 . 첨사도 완도로 행차할때는 이길을 이용했다. 그리고 고인돌이 있어 쉬어간 곳이다. 사방이 방장하여 5만평에 달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의병과 왜군이 싸울때, 기점표시가 되어 군사 기밀지로도 이용하였고 총기 보관까지 했던 기밀거점의 역할도 했었다고 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군외면의 중앙지이기도 하다. 1910년경 오석균, 김영현 학자 의 주선으로 군외사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마을 명칭을 교인동 으로 하였고 학교 명칭은 교인학교로 하였다. 학교가 있어 항일운동의 본거지로서 역할이 커지면서 일제의 압박도 심하여 결국 폐교하다시피 하여 불목리로 옮겨졌다. 국회의원 김선태를 비롯하여 도의원 ,대학교수 등 이학교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학교가 있던 시절 군외면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방풍림을 구축하였다. 이마을의 시작은 화전민 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1972년 교인리로 분구 되었다. 현재 원동완도간 4차선 도로가 예정되어 공사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밖의 명칭

숙승봉 완도 사람으로 송림대사라는 속칭 앙살래중으로 불렀던 분이 있었는데 성은 석장리 오씨로 알려져 있다. 이 대사가 해남 대흥사 주지로 임명 받았으나 성질이 괴팍하여 텃새를 이기지 못해 다시 완도로 오던중 자기가 있을 곳을 마침 숙승봉으로 결정하여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숙승봉은 해발 436m의 봉우리에 빈몸으로도 올라가기 힘든곳을 논흙을떠다가 방을 놓고 불을 넣었던 흔적이 지금도 완연하게 남아 잇다. 전설에는 하루 아침에 이봉을 세번 돌앗다고 하며 굴안에 쌀나오는 구멍과 물나오는 구멍이 있엇는데 손님이 와서 상자승이 쌀구멍을 쑤셔버려 안나 왔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숙승봉 큰굴/ 점바위 등

남선리(南仙里)

조선효종대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부터 많이 생산되는 석화(石花)는 널리 이름이 나있다. 속명으로 꿀포리라 하였고 석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암군 북평종면 석포로 황장과 함께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되면서 1855년 완도 내면에 황진리로 통합되어 편입 되었다.

해방이후 1946년에 황진리에서 분리 되면서 "남방게"라고 부르던 이름을 따 남선리라고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당시 까지는 만수와의 나루터로 "꿀포리" 나루터로 불리워 졌다. 마을앞에 닭섬이 위치해 있는데 간조시에는 걸어서 들어갈수가 있고,겨울철에 외가리가 둥지를 트는 아름다운 무인도 이다.

개펄이 발달하여 굴,번지락.고막 등 패류가 발달하였고, 가을철에는 문져리(망둥어)낚시가 쏠쏠한 재미를 더해주는 마을이다.

그밖의 명칭 꿀뻐리/남방계/은선동/큰고랑/장태고랑/동매/딱섬/해구덕밭/오소리몰랑/왁새꾸지/신다물바지락 등

영흥리(永興里)

조선 효종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946 에 불목리에서 분구 하였다.

덕운내는 '더울내"라고 속칭하여 오던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데서 유래한것인데,울창한 덤불이 얽힌내란 뜻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이 지금은 깨끗히 정리 되었지만 옛날에는 아주 험난한 덤불로 된 여울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용소는 원불교 훈련원을 통하여 흐르는 계곡밑에 있는 용둠벙이라는 지소부근의 마을을 가르키는 곳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수원이 풍족하여 용이 승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밖의 명칭 정터골/고래안(고려안)/마당바우/불선바위/용둠벙/한독개/참나무개/고막치미/땅끝/발막기미/해남등/영암내/영흥제 등

불목리(佛目里)

조선 숙종대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옛날에는 마을 관할구역이 광활하여 부속도서를 제외한 현재의 대창리 ,영풍리,영흥리,은선동 까지 행정구역으로한 광대한 마을 이었으나 1855년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함에 따라 영풍리 대창리가 신설되어 분리 되었고 관할 구역은 줄어 들었다.

마을 위의 큰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형상이어서 불몽리,또는 불목리라 불이어 오다가 근세에 불목리(佛目里)로 개칭 되었다. 숙승봉밑 산기슭에는 원불교 훈련원이 있어 전국 신도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수련장으로 활용될뿐 아니라 일반 기관,단체의 수련장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고마리(古馬里)

조선시대 초기에 이 마을의 "서끝"에 마도진이 설치 되었으나 선박의 출입이 불평하여 강진현 마량으로 진이 옮겨가면서 옛마진 이라고 이름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하여 고마도라 불렀다.

선조대 훨씬 이전부터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그 자세한 내역은 알수가 없고 그후 이조 숙종대에 마을을 형성 하였다고한다.

일제시대 강진군 행정관할 고마도 초대 책임자는 김재윤씨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불목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후 분구 되어 형재의 고마리를 형성 하였다.

그밖의 명칭 고마도/노선창/굴바위/선바위/나루바위/넓자위/돈두바위/병풍바위/독지골/거사골/속등/신등/도둑골/상골/논골/동구골/새몰/웃몰 등

토도리(兎島里)

이조 선조대인 1586년 양천 허씨가 처음으로 이섬에 들어와서 3대를 거치는 동안 서씨와 고씨가 이주해와서 조그마한 섬마을을 이루면서 살았고, 지금은 30여 가구가 모인 어촌 마을로 생활권은 물이 나면 직접 걸어다닐수 있는 해남 북평면에 속해있고,행정구역은 군외면이다.

그밖의 명칭 토도/장구섬/뒷목/목잔등/목넘/도채바위/서굿대/제당 등

영풍리(永豊里)

조선 숙종대인 1686년에 주민이 입주하여 띠밭과 덤불로 버려진채 불모지였던 들녘의 산기슭이나 해변에 산재되어 정착 하였다. 그러나 단위마을이 되지 못하고 불목리에 소속되어 "띠등"이라고 불리워 졌었다. 그후 1855년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되어 완도내면 영풍리로 독립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창리 , 사후도를 통합하여 큰마을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띠등"이라고 하였는데 1794년 전라감사 이서구공이 이곳을 지나다 좌우를 살펴 산좋고 물좋은 이들녘의 뒷산에 치수하여 버려진 땅을 개간하면 영원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 될것이라 하여 영풍리라고 불러준 마을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 주민들이 이감사의 은공을 기리어 점바위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밖의 명칭 통샘/독바우/꾸지나무께/용치꼬랑/문박우등/부삽바위/사후도 등

대창리

  • 대창리1구(大倉里1區) 1700년경 숙종때 주민이 이주하여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선창구미로서 영풍리에 속해 있다가 해방이후 하대수와 합하여 대창리로 통합하여 분리 되었고 그후 1957년에 대창1구와 2구로 분할 되었다. 대창리는 하대수의 중간 자(字)인 "대(大)자와 선창리(船倉里)의 중간자인 창(倉)자를 합하여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 그밖의 명칭 붉은여/배바위/복바위/총치몰랑 등
  • 대창리2구(大倉里1區) 1890년 광상김씨가 여수에서 이주해와서 마을에 정착한후 김 양식업을 위하여 각처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급속히 번창하였다. 대수골 밑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대수라 칭하였고 1855년 완도군이 만들어 지면서 영풍리에 소속된 자연마을로 있다가 1945년 해방후 선창구미와 합하여 대창리로 통합되었으며 , 1957년 분구하면서 대창1구와2구로 되었다. 아주 옛날에도 이곳에 삶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지고, 그 흔적으로 마을 앞산에 동굴이 있는데 그안에서 토기파편과 화덕자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그 위치만 구전되고 있다. 그밖의 명칭 질매재 등

용계리(龍溪里)

지금부터 약 270여년전 동네 동쪽 새작골에 용암사라는 절이 있고 동네 앞으로 냇가가 흐르고 상단부에 용둠벙이 있었다. 그래서 용암사아는 용(龍)자와 시내가 흐른다고 해서 시내계(溪)를 붙여서 용계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앵계"라고도 불렀다.

해방전에는 신흥,망축,초평,용계리 4개 마을을 신학리라고 했으나 1945년 해방이후 초계리로 분구 되었다가 1954년 용계 ,초평으로 분구 되어 오늘의 용계리에 이르고 있다.

그밖의 명칭 새작골/큰골/메밭골/보튼골/새추골/불목재/큰학등/지추바위/펜판/피마당께/숙승봉/남사당/짱바탕 등

망축리(望築里)

1570년경 선조대에 신창표씨 형제와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입주 하였으나 대산리로 난을 피해 이주하고 그후 현종대에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점차 마을을 형성 하였다.

옛날 개펄을 축방하여 앞들을 조성하고 마을 옆에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방축리라고 불러왔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학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되어 분리되면서 뒷산에 마주봉이 있어 달리는 말의 형국으로 학문을 즐기며 마주봉과함께 후손들이 대성할것을 바라는 뜻으로 망축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밖의 명칭 똘갓/무동골/마주봉(일명 마주박)/장수바위/효자비/개미절터 등

초평리(草坪里)

남평 문씨가 마을 뒷산 화학동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그후 신창 표씨, 경주정씨가 난을 피하여 방축리에서 옮겨와 점차 마을이 형성 되었다.

큰산밑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대산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학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후 분리 하면서 초평리로 개명 되었다.

속칭 "번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제주에서 많은 말이 이진진을 통하여 한양으로 가던중 마을앞 넓은 들판에 자생 초원이 있어서 망릉 임시로 사육하였으며 번던으로 변하여 불리워 오다가 해방후 분리 되면서 넓은 초원을 뜻하여 초평리로 명명 하였다.

신흥리(新興里)

밀양 박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거주하였고 마을 중앙에 연못이 있어 "둠벙치"라고 하였으며 대산리에서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해서 신리라고 하였었다. 완도군이 만들어 지면서 초전리와 합하여 신흥리라고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방축리,신흥리,대산리,황진리의 일부와 용계리를 합하여 신학리라고 하였으나 일제시대 말기인 1943년 분리하여 신흥리로 다시 마을 이름을 환원 하였다.

그밖의 명칭 둥벙치/외등개/대다리등/또랑개/개추/참샘/연내 등

대문리(大文里)

조선시대 선조대에 신창표씨 형제와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던 대산리 주민들이 바닷가로 분가하여 와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옛날에는 초전리라 하였으며 둠벙치와 합하여 신리라고 하였었다.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대산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산리의 일부와 갈문리 화학동을 합하여 대눔리 라고 하였다.

1914 면계 변경으로 신정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이전 하였으나 면 중심지로 옮겨야 한다는 동부 주민들의 여론에 따라 1917년 현 면사무소 자리인 옛 원집터로 이전 하였다.

마을 뒷산에 성터가 있고 말을 키워 제주에서 서울로 공물을 수송할때 이곳에서 초전을 조성하여 임시 사육 하였다. 초전리 라고 하는 지명의 유래는 여기에서 연유하였고 주위 경치가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쉬어간 곳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밖의 명칭 사장동/화재둠벙/서당골/장사발자욱/또랑개/초전마을/웅개신당/옹달샘 등

갈문리(葛文里)

조선시대 선조때에 성주 배씨,제주고씨,청주한씨등이 바다건너 해남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완도군이 만들어지면서 산골의 화학동을 갈문리에 통합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산리와 합하여 대문리로 개칭되어 부르다가 해방 직후에 다시 갈문리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팡 방풍림은 풍치를 아름답게 할뿐만 아니라 바닷가에 길게 돌출되어 있어 이를 이용하여 간척 방축함으로써 농토가 확장되어 마을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왜란을 피하여 산중화학동으로 이주하고 텅빈 마을은 칡넝쿨 우거진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여 갈애골이라 한데서 유래하여 갈문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의 명칭 봉두산/사슴당/절꼬랑/생애바위/미끌바위/진재/코팽이/느진목/붓둠벙/연축골/한새꼴창/몽낭개/솜치/봉사굴/범바위/산바위/넙바위/천장맷둥/치끝/망태골 등

삼두리(三斗里)

조선 선조때에 안씨와 유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대가 끊어지고 숙종때에 밀양박씨가 이주하여 자작일촌으로 마을을 크게 형성 하였다.

1914년 이전까지는 두읍리라 하였으나 삼장동과 합하여 삼두리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완도군이 생기기 전에 번창했던 삼장동은 김양식업을 위하여 하산하여 이주함으로써 해안지대에 새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금 삼장동은 3가구가 남아 있을 뿐 산지초원으로 변하여 그 흔적마저 찾을길이 없게 되었다.

1915년 의병 50여명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왔다가 일본경찰에 쫒기어 목벌잔등에 이르러 항전하다가 의병대장이 전사한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때부터 목벌잔등이라 부르게된 이곳을 지금도 주민들이 지날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뜻을 새겨 고개숙여 묵념을 드리고 있다.

두읍리는 1800년 이전에는 노구미라 하였으며 1855년 이후부터 등장한 이름으로 그유래는 알수 없으나 속칭 "드릅리" 라고 전해오고 있고 마을 남쪽 당인리 입구 해변 산지를 노하구미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경치가 좋아 지금도 삼두팔경이라 하고 있다.

삼두팔경

관음모종/봉두운귀/농로열부/원포귀선/우암서수/화암춘경/도리풍무/상황일출

당인리(唐仁里)

조선시대 선조때에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세포리로 이주하고, 숙종때에 양천허씨, 경주정씨,연안차씨 등이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 하였다.

당인천리나 "된네"라고 불러 왔었다. 가리포진이 독진이 되어 1855년 당인리라 불렀고 완도군이 만들어 지면서 1896년 영암땅이던 흑일도,백일도 ,동화도,서화도,어불도를 편입하였다. 1917년 해남군에넘겨주고 남은 4개의섬은 법정리로 당인리에 속하고 있다.

마을 이름 당인리는 "된네"라고 지금까지 전하여 불려지고 있다. 옛날에 당인천리라고 표기되어 왔으며, 이는 대인천이나 唐人川이 당인천 唐仁川으로 변경되어 표기된것으로 보고 잇으며 옛날 청해진 완도에서 가장 지형이 험준하고 교통이 불편한 최장거리인 곳으로서 이곳이 당나라 사람의 왕래와 연유된 이름일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계미민요의 창의사인 허사겸은 이곳 출신이다.

그밖의 명칭 옥녀봉/동산등/큰골/탱주재/안산/화천/소나무재/안고랑 등

백일도(白日島)

조선 숙종때에 신안주씨가 처음으로 이섬에 들어온후 강릉 유씨가 이주해 왔으나 후손이 없고 주씨들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후 여러 성씨들이 이주 하였으나 주씨들이 섬 전체를 매입하여 주씨천국을 이루고 있다.

맑고 깨끗한 바닷가의 하얀 모래와 차돌이 빛을 발하여 육지에서 보아 황홀한 천국을 이룬 깨끗한 섬이라 하여 백일도라 불렀다. 영안군의 내도에 속해 있다가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군외면 당인리에 편입되었다.

그밖의 명칭 희나리섬/차돌매/오지바우/서푼역개/두꺼비바우 등

흑일도(黑日島)

1735년 백일도의 입도조의 차남이 처음으로 이주하였고 그후 강릉 유씨가 들어와 차차 마을을 형성 하였다. 백일도의 서편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흑일도라 하였다. 백일도의 동편섬 동화도는 백일도의 입도조의 큰딸에게 내주고 서화도는 차녀에게 내주어 그로부터 생긴섬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사후리(伺候島)

조선 효종 때 제주도로 귀양 가던 박씨, 양씨가 처음 섬에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하며 모래가 많고 까마귀가 많다 하여 처음에는 ‘사조도’라 하였으며 주위에 달도(達島)가 있어서 사위를 뜻하는 ‘사후도’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옛날에 섬 입구에 마도진이 있었고, 이곳에 사후선(정찰배)이 있었던 자리여서 ‘사후도’로 불렀다는 설도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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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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