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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금일읍의 연혁

  • 고려시대 : 장흥부 관산면에 소속
  • 1621년 : 평일도와 생일도는 고금진에 이속 (금당도는 계속 장흥부에 소속)
  • 1890년 : 여수군 거문진으로 이속
  • 1896년 : 완도군 신설로 평일면, 생일면, 금당면이 설치
  • 1916년 : 평일, 생일, 금당 3개면을 합하여 금일면으로 개칭
  • 1962. 1. 27 : 금당출장소 설치
  • 1971. 5. 24 : 생일출장소 설치
  • 1980. 12. 1 : 금일읍으로 승격
  • 1986. 4. 1 : 금당출장소가 금당면으로 분면
  • 1989. 4. 1 : 생일출장소가 생일면으로 분면

마을유래

감목리 유래

조선조 인조때 경상도 마산(慶尙道 馬山)에서 함안 조씨(咸安 趙氏) 석장(碩璋) 배를 타고 인천(仁川)으로 항해하던 중 평일도(平日島) 근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평일도에 상륙하여 구동(龜洞)에서 일시 거주하다가 1628년 감목리(柑木里)로 이주하여 장착한 이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뒷산에 큰 감나무(柑木)가 무성하여 감나무골로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로 쓰면서 감목리(柑木里)라 부르게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上 .下 화전리(花田里)를 합하여 화목리(花木里)라 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후에 각각 감목리와 화전리로 구분되었다. 감목리는 금일면 때부터 읍으로 승격된 지금까지 읍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각급 기관단체가 있다.

상화전리 유래

본동의 태초의 개벽은 죽산 안씨로 구전 되고 있음, 현세인으로 정확한 고증으로는 본동 죽산안씨의 입도조 "안찬지"씨가 지금으로부터 4백여년전 그러니까 서기 1592년(선조임란)을 전후하여 전남 보성에서 당시 임진왜란을 피하여 십칠세 젊은 나이로 단신 입도하여 동송리 김씨가문의 규수를 부인으로 맞아 본동 영주케 되었음 본동명을 화전리 라 함은 마을 들을 둘러싼 청룡등을 시발로 큰산봉.뒷산봉,광등산봉,앞산봉,(속칭 평내산)등 4개 산준령이 흡사 꽃망이 만개한 형국이라 이름하여 호전리 라 하게 되었다는 설과 이 4개 준령의 중원벌량 구레설의 풍부한 수자원에 총유하며 옛날에 이 평온지 일대가 아 름다운 꽃들이 자생하여 꽃밭을 이루워서 화전리 란 동명의 유래로 고증케됨

이상 서술한 것과 같이 이루워진 본동은 인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화합하여 동중조경사는 물론 대소사시에 전체가 단연일체를 화합하며 상부 상조의 정신이 투철하고 일상생활에서 중상 모략이나 고소가 없는 유일한 마을로써 근본 행정구역은 감목,화전을 합하여 화목리며 현하화전리 는 본리 민의 생활방편 인 선창 이었는데 관내여객선의 기항과 금일수협 사무소 수직판으로 인구가 증가 서기 1962년 7월 본동과 분구 상.하전리로 분리 하였다.

하화전리 유래

1880년대에 함안 조도순(咸安 趙道淳)씨가 장흥 대덕에서 회진포(會鎭浦)에 내려와 살면서 상화전리의 안씨와 결혼한 후 정착하였고, 상화전리가 점차 커지가 1890년대에 안홍도 (安洪道)씨가 하화전리로 내려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해방이전에는 가구수가 적어「화전포(花田浦)」또는 「야금(冶金)」으로 불리워졌는데 야금이라 함은 쇠가 녹도록 돈을 모아 부촌(富村)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었고 1961년에는 하화전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평리 유래

조선 효종때 평강 채미계(平康 蔡美繼)씨가 보성(寶城)에서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居金島)로 이주하였는데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그곳은 자기들이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채씨는 이주하었다고 전한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세미(稅米) 수집관아가 이곳에 설치되어 도청리(都廳里)라 했으나 완도군이 설군된 이후 관아(官衙)가 없어지고 간척지 조성으로 농토가 확장되자 신평리(新坪里)라 칭하였다고 한다.

구동리 유래

조선 시대 인조 때 영양 천경흥(穎陽 千慶興(형))과 千金興(동생) 두 형제가 본래는 장흥군 남창 동촌에서 살다가 그 부모가 사망하니 마을 뒷산에 묘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 평일도로 피신와서 형은 깊은 용항리(龍項里)로 들어가고 동생은 구동(龜洞)에 정착하였는데, 거의 동시에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차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뒷산이 거북 형상이고, 마을 앞 옆동산이 거북 발 형상인데다 연안 개펄에 거북이 살았기에 거북과 같이 장수(長壽)하라는 뜻에서 구동(龜洞)이라 하였다고 한다.(구동리에는 금일 초등학교가 있다.)

척치리 유래

조선 시대 효종(孝宗) 때에 서양선(徐良善)이 장흥(長興) 웅치(熊峙)에서 멀리 바라보니 남해에 섬들이 많이 있어서 "저런 섬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호기심이 처남인장씨(張氏)를 데리고 배를 타고 이곳 척치리(尺峙里)에 상륙하여 살펴보니 사람살기에 알맞다는 판단하에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마을 지명의 유래는 마을앞 바다에 자(尺)같이 생긴 섬이 있어서 척(尺)자와 서양선의 고향인웅치(長興 熊峙)의 치(峙)자를 합하여 척치리(尺峙里)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도장리 유래

조선조 광해군때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창녕 조씨(昌寧 曺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들과 거의 같이 처음으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위의 3성씨가 입주시부터 현재까지 매년초에 동제(洞祭)를 같이 지내고 있다. 마을 지명의 유래는 평일도가 장흥군에 속했을 때, 도장리는 선박출입의 관문이었고 평일도의 모든 마을에서 나라에 바칠 세곡(稅穀)의 창고가 도장리에 있었으므로 도장리(都莊里)라 명명하였고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납다지(納多地, 창고가 있었던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의 근처 바다에 있는 칠기도(七岐島, 7개의 유무인도)를 이 마을 소유자로 하는데 유명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일정리 유래

조선시대 효종때 밀양 손씨(密陽 孫氏)가 처음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후손은 없고 영양 천씨(潁陽 千氏) 8대 조인 구동리(龜洞里) 천금흥(千金興)씨의 차남이 정조때에 일정리(日亭里)로 분가하여 이주한 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공동우물가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서 우물 물맛이 아주 좋고 정자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려서 우물물에는 해가 비치지 않으므로 일정리(日亭里)라 하였다고 한다.

궁항리 유래

조선 효종때에 이천 서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이어 조양 임씨가 형제동반으로 들어와서 당을 지어 신령을 모셨으며 경주 최씨가 입주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지명의 유래는 조양 임씨가 신당을 짓고 섬기면서 「당머리」라고 불리웠는데 1935년에 용항과 함께충동리에 소속되었다가 1945년 해방이후 분구되었고 지형이 활 모양으로 생긴데서 연유하여 궁항리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용항리 유래

조선 인조때 영양 천씨 경흥이 장흥에서 동생 금흥과 함께 평일도로 들어와서 동생은 구동에 정착하고 형인 경흥은 깊숙하고 산수가 좋은 이곳 용항에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김해 김씨와 결환하고 세거하였고 이어 김해김씨, 경주 이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엿다. 일제 시대에는 충동리에 소속되었다가 1945년 해방이후에는 분구되어 용항리로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이 마을 주위의 형국이 용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라 하였다고 한다.용항리 앞바다는까만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너무 아름다운 해변을 볼 수 있고, 파도에 쏴ㅡ하는 소리는 마음까지 씻겨준다.. 아침 해돋이에는 바다 앞족에 있는 무인도와 일출이 함께하여 장관을 이룬다.

동송리 유래

조선시대 선조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피하여 산좋고 물맑은 이곳으로 가족을 동반하여 처음 이사한 이천서씨에 이어 김해 김씨, 경주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지명유래는 이 마을에 소나무 숲이 좋아서「솔개」라고 불러왔는데 일제시대 때에는 용항, 충도를 합하여 충동리라 했다가 1945년 해방이후 각각 분구되어 이 마을을 동송리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마을 앞에는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월송리 유래

조선 효종때에 함안 조씨(咸安 趙氏)가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조선 숙종때는 청주 한종국(淸州 韓宗國)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이루고 송호재(松湖齋)라는 서당을 만들고 후진양성에 힘썼었다고 한다. 부근에 백사장이 있어 자연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송림(松林)이 울창하여 달밤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월송리(月松里)라 명명 했다고 전한다.

동백리 유래

조선 명종때에 진주 강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고 하나 그 후손이 없고 1600년경 선조 말기에 경주이씨 이현영씨가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백리에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있고.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와 겸하기에 좋다.

사동리 유래

조선 인조때에 밀양 박씨 재룡이 장흥대덕에서 행상하러 들어왔다가 정착하여 자식을 보기위해 용항리에 데릴사위로 들어 갔었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이후 기계 유씨와 안동 권씨가 동시에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섬 앞바다의 물결이 항상 잔잔하다 하여 소랑이라고 했다는 설과 이 섬 자체의 생김새가 소랑(소라)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소랑도라 했다는 설이 있다. 소랑은 소라의 방언이다.조선 효종대에 이씨가 건너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명의유래는 원래 마을 건너에 소랑도라는 섬이름을 따 불리어 오다가 마을 부근에 죽림이 무성하여서 죽동리로 명명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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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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