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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완도읍의 유래

고종 33년(1896년) 설군과 함께 군의 중심지에 있다하여「郡內面」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莞島面」이라 하였고, 1943년 읍승격과 함께[莞島邑]이라 칭하였음.

완도읍의 연혁

  • 신라 흥덕왕 3년(828년) : 죽청리,장좌리 일대에 청해진을 설치
  • 신라 문성왕 3년(851년) : 청해진 폐진
  • 조선 중종 17년(1522년) : 소가용리에 가리포진을 설치
  • 조선 고종 31년(1894년) : 가리포진 폐진
  • 고종 33년(1896년) : 설군으로 郡內面이라 칭함
  • 1914년 : 행정구역 개편으로 莞島面이라 개칭
  • 1943년 : 邑으로 승격
  • 1973년 : 군외면 대야1 · 2리가 本 邑으로 편입

마을유래

군내郡內里

마을형성

1522년(중종17년)가리포진의 설치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895년에 폐진되어1896년 완도군 설군과 함께 군청소재지가 되었고, 1916년 완도면 소재지가 장좌리에서 군내리로 이전됨으로써 완도의 중심마을로 형성됨

지명유래

중종17년(1522년)에 완도항을 가리포진으로 설진하고 수군 600명으로 해상을 지키게 하였으며, 마을명을 가리포라 하였고 그 후 군내리라 하였으나, 설군과 동시 군정의 중심지라하여 군내리로 개칭하였음

특기사항

군청소재지로서 군단위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상업을 주업으로 소득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완도읍, 군외면, 신지면, 청산면민의 생활중심지임

망남望南里

마을형성

이조말(1805년) 완도군 청산면 상서리에 거주하던 임두남씨가 목포, 여수등을 목화장사차 배를타고 항해하던중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본 낭기미(현 망남리) 해안으로 밀려 정착하게 되어 대를 이어 살게 되었음

지명유래

당초"본랑기미"라고 불렀으나 1951년 망남산을 중심으로 맨 남쪽에 위치하여 망남산을 바라보는 형상이라 해서 망남리로 개칭하게 되었다 함

특기사항

본 마을은 원예작물(딸기, 깨, 고추)를 주 특작물로 생산하고 있음

전설

마을 뒷산이 마치 부엉이 머리모양과 같아 부엉이 바위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산울림이 마치 부엉이 울음처럼 들려 중추절에는 부엉이 바위에 바위제를 지내 왔다는 전설이 있음

소가용小加用里

마을형성

현종대에 나주정씨가 처음으로 입주하고 그후 양성이씨, 남평문씨, 밀양박씨등이 이주했다 함

지명유래

대가용리 앞산(진중매산)의 형상이 용같이 길고 쭉 뻗어서 가용리(駕龍里)라 하였는데 후세들이 쓰기 쉽게 바꾸어 가용리(加用里)로 칭함. 1916년 대ㆍ소가용리를 합하여 가용리라 했다가 1926년 다시 소가용리로 구분하였다.

대가용大加用里

마을형성

통일신라 장보고장군이 청해진을 설치해 3~4호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청해진 폐진과 함께 자취를 찾을 길이 었었고 선조대 남원양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여 수성최씨, 김해김씨, 전주이씨등이 이주하였다.

지명유래

앞산(진중매산)의 형상이 용같이 길고 쭉 쭉 뻗어서 가용리(駕龍里)라 하였는데 후세들이 쓰기 쉽게 바꾸어 가용리(加用里)로 칭함

전설

대가용리와 죽청리의 경계선에 '목길'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길은 읍내를 통한 길목으로서 옛적에는 불량배가 은신, 행인을 해치는 무서운 곳이어서 사람들이 통행할 시는 주위를 살피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음

신기新基里

마을형성

약 300여년전 청산면에서 거주하던 추계추씨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농사가 많고 수자원이 풍부한 본리에 입주하게 되었다 함

지명유래

일제시대에는 가마(짝지)구미라고 하여 일본 한민들이 정착지가 되었던 곳으로 행정구역은 가용리에 속해 있다가 1980년 신기리로 구분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터라해서 신기리로 칭하였음

특기사항

일제시대에는 어장(멸치)으로 유명하였으나 현재는 김, 미역이 주소득임

죽청竹靑里

마을형성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고려 삼별초난때에는 엄직목장군이 피신 은거 하였으나 청해진 폐진과 함께 그 자취를 찾을길이 없음. 임진왜란 후 평강 채씨,원주이씨가산세, 지세가 훌륭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함

지명유래

약300여년전 주민이 정착할시 죽림으로 뒤덮여 파랗고 또한 숲이 울창하여 깊은 산속 흘러나온 계곡물이 너무 깨끗하여 울창한 대나무와 맑고 파란물을 상징함

특기사항

옛날 마을 한길가에 오씨가 한약방을 경영했는데 이 약방은 동네 늙은이들의 집합소가 되어 이고장의 방송국이요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오씨 영감은 마음이 정직하여 쪼그라지게 가난하게 살았는데 도깨비가 변신하여 10여명이 돈을 짊어지고 와서 주고가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음.

전설

완도읍 소재지 식수원인 상수도가 일제시대부터 설치된 곳임

장좌長佐里

마을형성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의 설치로 마을이 형성되어 동남아에 명성을 떨쳤으나 청해진이 폐진됨으로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나 고려대에 정언이영이 귀양 온 곳으로 그의 숙인 혜일승이 같이 와 절을 짓고 포교한 곳임. 삼별초난 때에는 송징장군이 이곳에 있었다하나 후손은 없는 것 같다. 임난 후 인도장씨, 진주소씨, 창원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한 후 1664년 광해군이 제주에서 입숙한 직후 경호를 맡다가 중추부령사로 완도에서 정착하고자 현풍곽씨,황씨, 문씨등이 입주하여 옴

지명유래

장좌리(長佐里)는 원래 장좌리(張佐里)로서 장씨(장보고를 칭함)가 있던 곳으로 표기되어 오다가 합병과 동시 민족역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왜정시개명 하여 장좌리(長佐里)라 칭함

전설

장보고 가묘는 장좌천 상류북향에 6기의 묘가 있다. 이곳 주민들은 목 없다는 묘(장보고의 목은 신라조정에 받쳤음을 알 수 있음)로 불려오고 있음.

대야1大也1里

마을형성

효종대 인도장씨,제주고씨,김해김씨,함안조씨등이 반대정파에 쫒기어 남하하다가 마을 뒷산이 참새모양처럼 생겨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어 정착하게되었다 함

지명유래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의 공공시설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청비리"라 하다가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에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비가오나 가뭄이 드나 끊이지 않아 대수라 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대야리라 개칭하게 되었음

전설

이조시대 최초로 "장"이 개설되어(완도,해남,강진)주민의 생필품 거래가 성행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도 장터라고 불러지고 있음

대야2大也2里

마을형성

1680년 숙종대 경주김씨, 진주강씨가 처음 입주하고 그 후 김해김씨, 남평문씨가 이주하여 정착

지명유래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의 공공시설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청비리"라 하다가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에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비가오나 가뭄이 드나 끊이지 않아 대수라 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대야리라 개칭하게 되었음

전설

옛적부터 용이 살았다 하여 용소(용둠벙)가 있어 사시사철 물이 솟아 물의 흐름이 끊이지 않는다고 함

망석望石里

마을형성

약 460여년전 선조대에 현 육구미 해변에 당쟁을 피해 다니던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입향하고 그 후 완산이씨가 입주하였으며 몇 년 후 나주임씨와 여러성씨가 입주하여 본 마을을 형성

지명유래

상항봉 용줄기가 구불구불 뻗어내린 서망산 줄기를 이은 본 마을의 위치는 토끼 형상 이요, 바라보는 앞산 반월형과 명월암이 동으로 남망 동남쪽에는 용암산, 대봉산이 솟아 있고 남방은 서남쪽에 육구미산, 서로는 초계산이 둘러 있어 보름달과 같이 둥근 일체형이므로 망리라 부르다가 1916년 행정구역편제로 석장리와 합하여 망석리라 칭함

전설

마을 앞산 옆쪽으로 공알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마을에서 보이면 마을에 재앙이 따른다 하여 주변에 수목을 우거지게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산림보호를 위한 전설인가 함

석장石場里

마을형성

약460여년전 선조대 육구미 해변에 당쟁을 피해다니던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입향하고 그 후 완산이씨가 입주하였으며 몇 년 후 현 여러성씨가 입주하여 본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음.

지명유래

약 200여년전 형성되었으며 배가 마을앞까지 드나 들도록 되어 있는 포구가 있었고 임진 왜란 당시 이순신장군께서 왜군과 적전을 대비해 돌을 많이 모아 두었다해서 석장포라 하였다가 현재는 석장리로 칭함

전설

수령이 약 300여년된 사정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농어제를 지내 왔으며 현재도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함

도암道岩里

마을형성

선조대 임관후 노씨와 설씨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왔으나 현재 거주치 않고 240여 년전 중분리에서 김해김씨가 분가하여 거주하였으며 그 후 진주강씨,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왔음

지명유래

상하마을 중앙에 용과 거북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고 용과 거북을 보호하는 앞.뒷 산에 바위가 많고 중도, 정도, 화흥, 가용리등의 길의 중심지라 하여 도암리로 칭하게 되었음

전설

마을입구에 암산바위가 있는데 옛부터 이 바위에서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바위제를 지내왔다하며 비가 오지 않을때는 지금도 바위제를 지내고 있다고 함

중도中道里

마을형성

선조대 임난 후 광산노씨, 김해김씨, 김휘원이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함

지명유래

마을뒷산의 형태가 범이 나무에 있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범림계라 했으나 일제 시대에 행정구역 편제시 중분리라 했음 도암리, 중도리, 사정리를 합해서 중도리라 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암리와 사정리는 분구되었음

사정射亭里

마을형성

약 300여년전 성산배씨, 배식, 배석형제가 나주로부터 병자호란을 피해 이주 하여 왔음

지명유래

청해진의 군사들이 활을 쏘는 사정(활량들이 모여 쏘는 활터의 정자)과 솔릿께(과녘)라는 곳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지명으로 보아 활쏘는 연습장이라 하여 사정리라 했다 함

전설

마을 뒤 해변에 선바위가 있는데 한 장수가 각시와 애정의 다리를 놓으려고 했으나 끝내이루지 못하고 각시는 조류에 밀려 구경짝지(지금의 구계등)앞 각시여가 되고 장수는 다리를 등에 멘체 선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사정리를 선바추라 부르고 있음

정도正道里

마을형성

이조, 선조, 임난후 라씨, 정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고 무안박씨, 최씨등이 입사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

옛지명은 정돌리라 했는데 샘정(井)자와 돌돌(乭)자로 정(井)자는 지혈출야, 땅에서 물이 많이 나와 고여있는 집수지란 뜻이며, 돌(乭)은 석야(石也) 또는 땅이름이다.돌이 샘처럼 많이 고여 있는 곳이라 해서 정돌리(井乭里)라 부르다가 1916년 리동 통폐합시 불교용어 정도(正道)에서 인용 마을이름을 정도리(正道里)로 개칭하였다 함

화개花開里

마을형성

선조대에 창원감씨가 처음 입주한 후 전주이씨, 연안차씨, 경주김씨가 이주하여 왔다

지명유래

리명을 하리(下里)라 했는데 이것을 화개동(花開洞)이라 개칭하였고 1916년 부흥리와 합하여 화흥리라 부르다가 해방 후 1945년 분구되어 다시 화개리라 했음

전설

마을 뒷산 바위잿터는 매년 정월 초하루날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제사를 모시는 장소가 있는데 마을의 연중행사로 앞산의 할미당제와 같이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있음

부흥復興里

마을형성

선조대에 수원백씨가 처음으로 제주에서 귀양생활을 하다가 풀려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상경하던 중수가 수려하여 입향하게 되었다고 함

지명유래

리명을 죽하리(竹下里)라 했다가 이조시대에 성을 쌓다가 황금이 나와 황금리(黃金里)로 개칭하였다 함. 1916년 부흥리와 화개리를 합하여 화흥리로 부르다 1945년 해방후 분구될 시 새로 일어서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부흥리라고 했다 함

전설

연대는 미상이나 옛선조들이 화흥리를 황금미(黃金味)라고 칭하였는데 황금미라 칭한 것은 마을내에 황금이 산재해 있다하여 황금미라고 하였음

대구大口里

마을형성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천조씨가 서제등, 삼림동에 처음 이주하여 왔고 그 후 풍양조씨, 남평문씨등이 이주하여 왔다.

지명유래

고산 윤선도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길에 산세가 수려함을 보고 뱃길을 돌려 가까이 와서 보니 지금 이동 뫼산이 큰 거북이와 같다 하여 大龜尾(대구미)라 했다가 글자가 획순이 많고 까다로와 후세에 대구미(大口里)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전설

마을 뒷산에 띠꽃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마을 주변을 나무숲으로 울창하게 가꾸어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현재도 바위주변 수목을 베지 않고 있다 함

대신大新里

마을형성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피해 묵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으나 후손은 없고 그 후 초계최씨, 김해김씨, 해남윤씨, 전주이씨가 차례로 이주 해와 마을이 형성 됨

지명유래

지명은 설군이전에 지세가 가는 포구를 이루어 세포리라 했으나 250여년전 마을 가운데 큰 정자나무가 있어 신정리라 명하다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대구미와 신정리를 합하여 대신리라 칭하게 되었음

전설

마을 가운데 수령이 약 500여년된 묵은 사정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제를 올렸으며 현재도 제를 지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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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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