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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Down

작성일
2014-03-17
등록자
배병욱
조회수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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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Down

첨부파일 : 인문 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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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남한 좌파운동의 역사는 당과 민중의 결합 그 이상으로 당과 민중의 괴리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폭발되었던 몇 차례의 대중운동은 당이 의도하지 않은 그리고 원치 않았던 봉기였다.

1947년에 일어난 대구항쟁도 그러했지만, 제주항쟁이나 여순봉기 같은 이 시기의 중요한 대중투쟁들은 남로당 중앙조직과는 상관없이 일어났다.
제주의 경우에는 남로당 제주도당부가, 여순사건의 경우에는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이 도화선이었고, 여기에 도민이나 지방 좌익이 합세한 것이었다.
사실 남로당 중앙은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투쟁을 일으킬만한 동기도 없었고, 계속 진행시킬만한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남로당은 분단정권 수립이 기정 사실화하면서 투쟁의 초점을 북쪽의 인민공화국 수립투쟁으로 이전하고 있었고, 이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의 필연적 연장이었다.

해방후 한국전쟁까지 남한에서 일어난 3대 항쟁이라 할만한 1946년 대구항쟁과 제주4·3항쟁 그리고 정부수립 직후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남북분단정권 반대 등의 정치적 구호가 전면에 나서기도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이 사건들의 성격을 설명하기 힘들다.
분단정권수립 반대 등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친일파 경찰과 청년단 폭력에 대한 반발, 쌀문제 같은 생계문제 등이 놓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봉기를 통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생활상의 고통과 모순이었다.
누적되는 민중들의 요구는 당의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등장했다.
민중들의 봉기 원인과 그 진행과정은 당의 의도와 목적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봉기들은 당에 의해 통제되지 못했고, 당이 예상하는 것 이상의 폭력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당과 기층 민중과의 인식상, 실천상 거리는 당 지도부에 의해 거의 인식되지 못했다.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미군정은 소련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을 제1차적 목적으로 삼고, 남한 우익세력을 원호하면서 좌익 탄압에 나서는 한편 대중을 체제내화 시키는 선거나 적산농지불하 등의 제도적 절차를 계속 마련해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로당은 농민·노동자가 지배권력으로부터 고통받는 있는 존재이므로 이들과의 결합을 자연스럽고 예정된 것으로 여기면서, 미군정이 취하고 있는 경제 정책으로부터 비롯된 대중포섭이라는 현실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는 남로당이 이미 비합법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은 억압받는 존재상태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과 결합할 수밖에 없으며, 당이 해야하는 임무는 이데올로기적 주입이라는 인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승만정권이 단독정부 수립 후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파시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 김구암살이라는 ‘49년 6월 공세’나 국가보안법으로 정적을 치는 정치세력 간의 테러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사회를 꽁꽁 묶어두려는 조직적 옥죄기가 이미 발동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정권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기만 하면 도착지의 해당 경찰서에 주민이 신고하도록 하는 유숙계(留宿屆) 제도를 실시했고,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청장년은 민보단과 대한청년단으로 묶었다.
사회 각 계층에 대한 촘촘한 그물망이 짜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반공이야말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선전이 강화되고 있었다.
숨막힐 것 같은 사회조직들이 겹겹이 싸고 있는 현실은 대중들의 신체를 직접 구속하면서 좌파가 주장하는 정치적 주장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생활상의 옥죔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감각했다.
그런 것은 제기할만한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결국 정치권력의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제와 반동 통치배들로부터 남반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 북쪽의 인민공화국 수립에 매진해야하고 혁명기지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정권이 주장한 반공(멸공)과 남북 좌파세력이 주장한 조국해방이라는 두 가지 민족국가형성의 담론에서 인민들의 자리는 찾기 힘들었다.
조공·남로당은 예상하지 못한 대중적 봉기를 민중의 자발적인 항거로 인정하면서 사후적으로 그것을 추인했지만, 이같은 대중운동의 양상 앞에서 당활동은 .. Down



..... (중략)






제목 : [인문][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Down
출처 : 레포트코리아 자료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2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인문][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파일이름 : 인문 사회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hwp
키워드 : 인문,사회,해방후,당운동,대중운동,결합,분리,당운동,대중운동,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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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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